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국공합작 (문단 편집) === 중소우호관계 조성 ===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이 중국에도 미치고 있었으며 폴란드와 발트 3국에서 연패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유럽 혁명에 실패한 [[볼셰비키]]는 이에 대한 타개책을 동아시아에서 찾기로 결정해 1918년 7월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외무인민위원은 오늘날 외무장관에 해당한다. 당시 각 소비에트 공화국은 명목상 독립국이었으므로 외교활동도 명목상 독립적으로 했다. 그러므로 이때 치체린의 직위는 소련 외무인민위원이 아니라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이다.] 게오르기 치체린(Georgiy Chicherin, 1872-1936)이 [[러시아 제국]] 시기 중국에서 취한 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1919년 3월 [[코민테른]]을 성립했다. [[5.4 운동]] 이후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던 가운데 1919년 7월 25일[* 혹은 7월 26일.]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대리[* 외무인민위원 대리는 오늘날 외무차관에 해당한다.] [[레프 카라한]](Lev Karakhan, 1889-1937)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중국 인민과 중국 남북정부에 보내는 선언>, 소위 <카라한 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제1872호 조회: 제1차 대중국 선언>을 발표했다. * 1. 소비에트 정부는 제정 러시아가 일본, 중국 및 제정 시대의 동맹국과 체결한 일체의 비밀조약을 폐기한다. * 2. 소비에트 정부는 중동철로와 그 일체의 부속권익을 무상으로 중국에 반환한다.[* 이는 원래 1919년 발표에는 없었으나 1920년 러시아 SFSR이 전달한 외교문서에는 포함되어 있다.] * 3. 소비에트 정부는 중국이 지불하기로 되어 있던 의화단 배상금을 포기한다. * 4. 소비에트 정부는 조차지, 영사재판권 등 러시아인이 중국 영토 안에서 소유하던 일체의 특권, 특수구역을 폐지한다. 이 선언은 8월 26일 이즈베스티야 지에 게재되었으나 중소 교통의 단절와 돤치루이 정부의 대소 봉쇄 정책으로 인해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중국에 알려졌다. 1920년 3월 3일 [[극동 공화국]] 외무장관[* 공식 직함이 Министр иностранных дел이므로 '외무장관'으로 옮김.] 야코프 얀손(Yakov Yanson, 1886-1937)이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중국의 주 이르쿠츠크 영사관에 제1차 대중국 선언을 전달했고 중국 외교부가 3월 26일에 이를 수용하면서 중국 각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 카라한 선언은 결과적으로 하나도 시행되지 않은 기만적 선언이었지만 볼셰비키가 표방한 피압박 계급의 해방, 비압박 민족의 해방의 구호는 중국의 혁명가들을 고무시켰다. 중국 각지의 316개 단체가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카라한 선언은 세계에서 제일 큰 빛을 가져다주는 것이 된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볼셰비키에 대한 우호감정도 대단히 높아졌다. 중국 정부는 1920년 7월 1일 경자배상금 지불을 중단했고 지금껏 [[러시아 제국]]을 승인하던 방침을 포기하고 1920년 9월 23일 러시아 제국이 파견한 러시아 공사, 영사들에 대한 외교관 대우를 중지하고 중국의 러시아 조계와 재산을 중국이 관리하겠다고 선포했다. 1920년 8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명목상 얀손의 후임이자 실질적으로는 볼셰비키측 친설사절단의 임무를 띤 이그나티 유린(Ignatiy Yurin, 1888-1935)[* 본명은 이그나치 긴톱트-지에바우톱스키(Ignacy Gintowt-Dziewałtowski)로 [[폴란드인]]이다. 후일 볼세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1925년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이 4차례에 걸쳐 베이징을 방문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했다.[* 원래 1920년 6월에 외몽골을 통해 방중하려 했으나 열강의 눈치를 본 [[안휘군벌]]이 입국을 거절했으나 1920년 7월 [[안직전쟁]]으로 [[직예군벌]]이 집권하면서 입국이 가능해졌다.] 1920년 9월 27일 카라한이 제2차 대중국 선언을 발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1. 러시아 제국 정부와 러시아인이 약탈하였던 것을 무조건 중국에 반환한다. * 2. 양국 정부는 신속히 상무와 경제 관계를 성립시키며 서로 최대의 이익이 되는 상무 조약을 체결한다. * 3. 양 국민은 영사 재판권의 특권을 향유하지 못한다. * 4. 양국은 중동로 철도에 관하여 협약을 체결한다. 이에 중국 정부는 1920년 11월 30일 외교부 아사위원회 회장 유경인에게 유린과 비공식적으로 담판할 것을 지시했으며 1921년 4월 정식으로 접대했다. 5월 8일 일시 귀국했던 유린은 7월에 다시 방중하여 중소 상무조약, 중동로 철도, 외몽골 문제를 협상했으나 진전은 없었다. 유린이 10월에 귀국한 이후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의 주도로 1921년 12월 파이케스가 러시아 SFSR 주중국 전권대표로 임명되어 12월 12일 중국에 도착해 중국과의 협상을 담당했다. 파이케스는 기존의 대중국 선언을 확인하면서도 기존의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권익의 전면 철폐가 아니라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즉 중동로 철도 문제와 외몽골 문제에 관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익을 사수하려는 것이 목표였는데 중국 정부는 주권 회수를 목표로 삼고 이미 실질적으로 이를 어느 정도 진행시켰기 때문에 협상에 응하지 않아 진전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